김덕균, 한국 드라마보다 멋진 중국과 함께 한 인생

2025-09-11 09:59:44

친구를 따라 오디션에 갔다가 우연히 주인공으로 케스팅되면서 벌어지는 짜릿한 이야기… 이런 장르는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한국 드라마는 아니지만 한국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덕균은 서울 근교 시골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 형이 보던 책인 <노장철학>을 몰래보다가 흥미를 느껴 성균관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으로 학사-석사-박사를 단숨에 마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중국철학 연구, 중국철학 명저 번역, 중국철학 사상 탐구 등의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노장철학>이란 책 한 권이 김덕균에게 열어준 이 창이 그를 한국 드라마보다 중국과 함께 한 더 멋진 인생의 여정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중국과의 인연은 매우 깊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삼국지>, <수호지> 등 중국 고전 읽기를 좋아했고, 한중 수교 이전인 1986년부터 중국 답사여행을 시작하였다. 1996년에는 산둥사범대학교 한국어과 외국인교수로 부임하였고 1997년에는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산둥사회과학원 박사후 연수과정을 시작했다. 그 후 그는 민간차원의 여러 교류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때론 주선도 하다 보니 산둥성정부가 수여하는 치루우의상(齊魯友誼獎)을 수상하기도 했고, 산둥TV ‘개방된 산둥’에서 그의 일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후원하는 해외한국학연구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산둥사범대학교 한국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김덕균이 중국과 함께 한 인생 여정은 여느 중국인보다 더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분주했다. 또한 그는 “저는 중국과의 인연은 매우 깊었습니다.”라며 중국과의 인연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혔다.

그가 밝힌 이러한 소회는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렀던 감정에 기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중국에서 겪은 경험과 깨달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막 중국에 왔을 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1997년 어느 날, 한 산둥성 칭저우시가 고향인 학생이 그를 고향으로 초청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 산둥 분들은 유난히 정이 많고 의리가 있어 손님접대 문화가 대단히 융숭할 때입니다. 초대받은 곳은 칭저우의 농촌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에 외국인이 처음 왔다며 동네 어르신들 상당수가 나와서 얼마나 환대하며 술을 권하시던지… 그때 저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습니다.”라며 그때를 생각하면 김덕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어느 새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중국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김덕균은 한마디로 ‘상전벽해’라고 요약했다. 그는 “중국 전역이 고속철 시대로 접어든 것도 그렇고, 대도시 대부분이 지하철 생활권에 놓인 것도 그렇고 여행과 답사를 자주 다니는 내게는 매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신용카드 단계를 뛰어넘어 현금을전혀 만지지 않고 거래하는 모바일 결재시스템 역시도 신선한 충격이며, 기사와 손님 모두의 안전망이었던 택시운전석의 철창이 사라진 것도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회가 투명하고 안전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그래도 변함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순수하고 밝은 학생들의 모습과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전에 접했던 중국학생들의 모습은 매우 순수하고 착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의 학생들도 그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며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말했다.

한번은 그가 학생식당에 식사를 하러 갔는데 현금과 카드결재에 익숙한 그는 아직 모바일결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가게 주인이 현금결재는 안 된다고 해서 그는 매우 당황했다. 그 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 한 명이 얼마냐고 묻더니 불현듯 계산하고 가 버렸다. 그는 달려가서 갖고 있던 현금을 주려고 했지만 그 학생은 괜찮다며 끝까지 받지 않기에 그는 할 수 없이 억지로 학생의 윗옷 주머니에 재빨리 현금을 넣어주었다.

그는 “순수하고 귀여운 학생들을 보고 저도 권위적인 교수의 모습을 내려놓고 친구와도 같은 교수로 학생들과 눈높이를 같이하며 수업 시간이 아닌 때에도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식사하고, 때론 여행도 함께 다니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했다.

“중국은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중국철학을 전공한 김덕균에게 중국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나라다. “정답은 현장에 있다는 말이 있듯 저에게는 중국은 어디를 가든 교과서와도 같은 반가운 공간입니다.”라며 그의 눈에는 중국의 오랜 역사와 문화, 수려한 경치, 독특한 음식 등 하나같이 매력적인 보물창고로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 각지에 지어진 커다란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며 항상 감탄하곤 한다.

한번은 산둥박물관에서 갑골문과 청동기문을 바라보면서 ‘전 세계 수많은 고대문명이 있었지만, 이렇게 단단한 갑골과 쇠붙이에 어떻게 글씨를 쓸 생각을 했을까?’란 생각에 골몰했던 적이 있다. 그는 ‘중국문명의 우수함은 기록문화에 있고, 기록은 이렇게 단단하고 강했던 갑골과 청동기에도 남겼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갑골과 청동기를 다양한 생활도구로 사용한 사례는 많지만, 거기에 글씨를 써서 당대사회의 삶과 철학을 문장으로 남긴 민족은 중국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덕균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중국에 어디를 가든 유교와 도교라는 쌍두마차가 중국문화와 사상의 흐름을 이어왔고, 또 그것이 민간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하나의 신앙이자 생활로 정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상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애틋한 모습은 유교적인데, 관우(关羽) 숭배를 비롯한 중국인들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의 모습은 매우 도교적입니다. 이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철학적, 이성적)와 도교적 실리주의(종교적, 감성적)가 복합적으로 묻어나는 생활양식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보다는 상호 조화통일을 중시하는 중국인 특유의 여유로운 문화와 사상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본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김덕균은 학문적으로 엄격한 ‘옛 서생’의 자세를 보이지만 ‘본업’을 벗어나면 그는 여행에 열정적이면서도 미식을 사랑하는 ‘전문가’가 된다.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산둥성 유가문화답사를 다녔고, 때로는 동북 3성, 신장, 내몽고, 구이저우성 같은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곳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에 어떤 역사 문화가 있는가를 미리 공부하고, 또 현장에 가면 제일 먼저 박물관에 들르는 그만의 여행수칙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다름의 여행철학이 있는데 어디를 가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보려는 생각을 접고 오로지 그 곳의 가장 특징적인 것 하나에 집중한다는 것이 있다. 그는 “지역마다 특징이 다른 중국의 다양한 문화와 음식을 최대한 누리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결심입니다.”라며 때때로 다른 한국인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한번은 한국의 제자들과 간쑤성 란저우시에 갔을 때,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란저우에 온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간쑤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마답비연(馬踏飛燕)’ 동상을 보며 중국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라면의 원조 ‘란저우라면’을 맛보며 중국 음식문화를 체험하는 일이다.”라고 알렸다. 그의 ‘관광 전략’은 항상 현지 관광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가 가장 정확히 핵심을 짚어낸 ‘관광 전략’을 살펴보면, 산둥 유교문화 답사 코스에 대해 내린 그의 전문가적 견해가 담긴 분석일 것이다.

그는 “산둥성 유가문화답사는 갑갑하고 재미없다 말하고, 또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매우 힘든 여정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왜 유가사상과 문화가 여기에서 나왔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경전 하나하나의 내용들이 얼마나 절실했던 문제인가를 현장에서 느끼며 의미를 찾는다면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분석했다.

“우호적 관계 유지의 관건은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구동존이(求同存異)’입니다.”

김덕균은 “오랜 역사 속 한중관계는 대부분 우호협력적 관계가 중심이었고, 이런 우호관계의 기본은 <논어>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가 주장한 ‘구동존이(求同存異)’ 철학의 계승과 실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중 양국은 개인 간이든 국가 간이든 공감할 수 있는 역사 문화적 요소들이 대단히 많다고 본다며 “이런 점을 감안하며 저는 한중 두 나라가 공유하는 성씨의 뿌리 찾기를 다음 연구 프로젝트로 구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요즘 산둥성 지방지(府縣志)에 수록된 한국학 자료(신라, 고려와 관련된 사항)를 정리하면서 뿌리 깊은 한중관계를 다시 확인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앞으로 양국이 공유하는 성씨의 뿌리를 찾아서 민간차원에서 성씨별로 자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실제로 공자의 후손인 취푸 공씨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공씨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시 창칭(长清)의 노씨 본거지를 찾아온 것도 비슷한 사례다. 그래서 요즘 그는 산둥성과 중국 곳곳의 지명 가운데 성씨가 들어간 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데 그 지명의 유래를 찾다보면 한국 성씨의 뿌리를 일부나마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두 나라 국민 간의 우정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학자이지만 ‘한중 우호,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신념은 이미 김덕균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이를 위해 그는 그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양국의 우호적인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왔다.

예를 들어 그는 한국의 몇몇 기관단체와 협약을 맺고 산둥사범대학교 한국어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복맵시경연대회와 한국노래자랑대회 등을 개최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있다.

그는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한국문화 체험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 만큼 교육적 효과도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례로 중국학생들을 만난 한국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학생들이 매우 순수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중국 학생들의 반응과 평가도 매우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인적 교류가 민간차원에서의 한중우호협력관계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성과도 크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양국 전문가와 학자 간의 교류 활동을 추진하는 데에도 김덕균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들어 그는 개인적으로 산둥성에서 열린 니산포럼 등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것 외에도 9월 산둥사범대학교 한국어과 교수와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하여 한국 충남 논산에서 열릴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할 예정이며, 산둥사범대학교가 곧 개최할 한국학대회에 한국 학자들을 초청해서 상호 교류할 계획이다.

“좋은 성과는 제가 같은 활동을 계속 추진하는 데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최선을 다해 연구자로서 한중문화교류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습니다.”라며 자신의 계획을 밝히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충만한 자신감과 기대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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