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장원권(状元卷)은 어떤 모습인가?
From:금교Author: 2025-07-02 14:31
또 한 해의 가오카오(高考, 중국의 수능시험) 시즌이 다가왔다. 매년 가오카오가 가까워지면 산둥성 칭저우시박물관에서 전시되는 명나라 조병충(趙秉忠) 장원권은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 유물은 어떤 매력이 있을까? 그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칭저우시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거대한 투명 전시대 안에 이 노란 장원권이 정성스럽게 보관되어 있다. 이 장원권은 길이 268cm, 높이 47.6cm로 3겹의 선지(宣紙, 서화용의 고급 종이)를 사용하여 장식되어 있고 총 19장의 접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부분은 총 4장의 접지로 저자와 그의 조상 3대의 이력서가 있는데 방송체(仿宋體)로 작성되었다. 첫 접지에는 전서(篆書, 한자 발전 과정의 고대 서체)로 쓰인 ‘예부지인(禮部之印)’ 4글자의 각인 인장이 있으며, 이 부분은 밀봉되어 있다. 봉인에는 ‘미봉관방(彌封關防)’이라는 긴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수험생의 이름과 이력서 부분이 밀봉되어 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뒷 부분은 본문으로 전체 2460자이며 15장의 접지로 구성되어 있고 1cm 정사각형의 관각체(館閣體)로 작성되었다. 놀랍게도 이 장원권의 글씨는 깔끔하고 일관되며 수정된 흔적이 전혀 없어 인쇄체와 견줄 만하다. 권수(卷首)에는 만력 황제의 친필로 쓰인 ‘제일갑 제일명(第一甲第一名)’이라는 6글자가 있고 권미(卷尾)에는 대학사 및 예부 상서(禮部尚書), 편부 상서(編部尚書) 등 9명의 채점관과 1명의 인쇄관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장원권의 글씨체는 칭송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매우 뛰어나다.
이 장원권의 시험 문제는 ‘제왕의 정치와 제왕의 마음을 묻다’로 수험생이 제왕의 입장에서 어떻게 통치하고 통치의 지도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변하도록 요구하며, 이를 통해 국가를 다스리는 데 대한 수험생의 통찰력과 전략을 평가하는 것이다. 조병충은 주제를 강조하며, 먼저 황제가 국가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실정(實政)’과 ‘실심(實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즉, ‘실질적이고 실행 가능한 치국(治國, 나라를 다스리다) 방법’과 ‘실질적이고 실행 가능한 치국 사상’을 뜻한 것이다. 또한 그는 ‘천민설(天民說)’을 제안했는데 이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제왕과 백성을 동등한 위치에 놓아 황제에게 백성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는 시험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사회 현실을 겨냥하여 각급 관리를 엄격히 선발하고 평가하며 의견을 널리 개방하고, 교육을 잘 실현하고 군대의 건설을 강화하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절약을 장려하며 부패한 관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10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제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고할 가치가 있다.
400년 이상 전의 봉건 사회에서 조병충은 황제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과 미래를 걸고 시사 문제를 비판하며 대담하게 많은 국가의 운영과 안정을 위한 제안을 제시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중한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날카로운 필치와 적절한 언어, 뛰어난 정치적 지혜로 시험관을 감동시켰으며 동시에 황제의 인정을 얻게 됐다.
조병충은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품행과 학문이 뛰어났는데 그의 성장과 재능의 개발은 좋은 가정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573년, 조병충은 명나라 청주부(青州府) 익도현(益都縣, 현재의 칭저우시)의 한 관료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조희(趙禧)는 산서 문수현의 현승(縣丞, 현의 부지사)을 역임하였고, 후에 예부(禮部) 우시랑(右侍郎)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대(代)처럼 관직에 나가 포부를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사료에 따르면, 명나라 만력 26년(1598년) 25세의 조병충이 전시(殿試)에 참가하여 장원에 올랐다. 이후, 그는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시독 학사(侍讀學士), 예부 상서 등의 직책에 역임했다. 그 후에 성격이 강직하여 직위가 삭탈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후 태자태보(太子太保, 고대 태자 교육을 담당하던 관직)로 추증되었다.
고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담고 있는 과거 시험이 일반 서생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길에서 성공하고 명성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험생은 동생(童生, 명청 시대에 아직 관원이 되지 못한 선비)부터 수재[秀才, 명청 시대 향시(鄕試) 입학 자격을 얻은 서생)까지, 수재에서부터 거인(舉人, 명청 시대에 향시에 합격한 사람)까지, 거인에서부터 경성(京城, 도읍)에 가서 회시(會試)에 참여하여 공사(貢士, 과거 시험에서 회시에 합격한 사람)가 되어야 하며, 그 후에야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에 참가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 제도가 지속된 1000년 이상 동안 단 700명 이상의 장원 급제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 자연 재해, 전쟁 등의 요인으로 인해 대다수의 장원 급제의 시험지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조병충 장원권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완전한 명나라 및 그 이전의 장원권 중 유일한 것이다. 따라서 조병충의 장원권은 중국 궁정 문서의 공백을 메울 뿐만 아니라 중국 과거 제도와 명나라 역사 연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다.
1991년, 산둥성 문화재 감정 위원회는 이를 국가 1급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2008년 6월, 이 장원권은 국무원이 발표한 첫 번째 국가 귀중 고서 목록에 선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장원권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1983년 어느 날, 웨이전성(魏振聖) 전(前) 칭저우시박물관 관장은 칭저우시 정무촌에서 문화재 조사를 하던 중, 마을 사람들로부터 마을 주민인 자오환빈(趙煥彬)의 조상이 명나라의 장원 급제자인 조병충이며, 그의 집에 당시의 장원 급제 시험지가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웨이전성은 만약 장원권을 보호하지 않으면 파손되거나 분실될 경우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조씨 13대 손자 자오환빈을 찾아 24번의 방문한 끝에 그들을 설득하여 장원권을 칭저우시박물관에 기증하게 했다. 나중에 고궁박물원의 전문가들은 만력 황제의 손글씨, 명나라 예부의 대인, 명나라 문서의 관방 인장 및 시험지에 등장하는 몇몇 명나라 관료의 상소 등의 유물과 사료를 비교하여 이 장원권이 원본 진품임을 최종적으로 판별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장원권은 궁중의 기밀 문서로 역대의 전시 시험지는 모두 궁전에서 보관되어야 하며 민간으로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병충 장원권은 어떻게 민간에 유출되었을까?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추측을 내놓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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